미래의 그림자 : 진실과 결단

약초의 향기가 차가운 밤 공기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서늘한 바람이 나뭇가지들을 부드럽게 흔들었고, 멀리서 벌레들의 미세한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숲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고, 모든 것이 이곳에 집중된 듯했다.

코르스의 손은 여전히 이리스의 붕대 끝을 누르고 있었고, 그녀는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어깨를 움츠리지도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잔잔히 호흡을 반복했다.

라크스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아 한동안 말없이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지나가고, 고요 속에서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울렸다.

 

이윽고 이리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리스. …그게 내 이름.”

 

그녀가 작게 뱉은 이름에, 라크스는 눈을 잠시 감았다.

“…그 이름… 어디선가…”

작게 중얼거리려던 그 순간

이리스는 긴 침묵 끝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들을 알고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라크스가 몸을 기울였다.

“무슨 뜻이야?”

이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금기를 입에 담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 양친은… 아니, 나는… 당신들의 딸로. 미래에서 왔어.”

그 말이 떨어진 순간,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다.
숲의 적막을 깬 것은 멀리서 울린 밤새의 소리였다.

 

라크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입을 열었다가 닫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어딘가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 스며들었다.

코르스도 숨을 삼키며 이리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우리들의… 딸? 미래에서? …대체 무슨 소리지?”

그것은 단순한 혼란을 넘어서, ‘우리들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는 미래의 무게가 현실로 다가와 가슴을 짓눌렀다.

라크스 또한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그런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가슴 깊은 곳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리스는 뇌석에 떨리는 손을 얹었다. 마치 마지막 버팀목처럼, 그것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와 달빛과 겹치며 어둠을 은은히 밝혔다.

 

 

코르스는 허리의 파우치에서 자신의 뇌석을 꺼냈다.
두 개의 빛이 겹쳐지자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다.

 

“…역시, 내 것과 같아…”

코르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뇌석… 설마 했는데, 이렇게 똑같을 줄이야…”

라크스도 숨을 삼켰다.

 

“눈도, 뿔도, 꼬리도… 그리고 그 힘까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딘가 ‘우리 둘이 섞인 존재’ 같다고… 느꼈었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뭇잎의 속삭임 속에서 세 사람의 숨소리만 작게 울렸다.

 

코르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거였구나…”

 

그 목소리에는 믿고 싶지 않은 마음과,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라크스는 조용히 허리를 내리고 이리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흔들림과 긴장이 떠올랐다.

 

“…가령, 그 말을 믿는다고 쳐. 그럼, 뭘 하러 온거야? 그저 ‘젊은 시절의 부모를 보고 싶었다’는 아니겠지?”

“게다가, 우린 마수한테 습격까지 당했어. 그런 위험한 짓을 해가면서, 목적이 뭐야?”

 

이리스는 잠시 침묵하며 시선을 떨궜다.
이윽고, 목소리를 쥐어짜듯 말했다.

 

“…내 존재를… 지우기 위해서.”

 

라크스가 고개를 들며 목소리를 낮췄다.
“…뭐라고?”

 

“당신들이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까…"

 

코르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설마… 우리를 죽일 생각이었어?”

 

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틀려… 힘으로 해보려 했지만, 안 됐어. 그래서… 부탁이 있어.”

 

“거절이야.”

라크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흔들림 없는 즉답이었다.

 

“기다려봐.”
코르스가 라크스를 제지하며 진지한 눈빛으로 이리스를 바라보았다.

 

“먼저, 이야기를 들려줘. 왜 자신을 지우고 싶은 거야?”

 

이리스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미래에서, ‘여자’로서 누구한테도 사랑받질 못했어.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도 나를 그렇게 봐주지 않았어.”

 

라크스가 물었다.
“가족은?”

 

“물론, 아빠랑 엄마는 날 사랑해줬어. 진심으로 말이야. 하지만 그건 ‘딸로서’의 사랑일 뿐이었어… 어떻게 해도, 그걸론 만족 할 수 없었어.”

 

이리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주변과 어울리지 못했어. 난 외모도, 힘도 달라서… 무서워하며 피해지기 일상이었지. 아무리 웃어도, 어딘가 벽이 있는 것만 같았어…”

 

“그러다 문득 생각했어. ‘나만의 존재’가 있다면, 내가 채워질 수 있지 않을까?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나만의 작은 생명, 아기를 낳는다면,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라크스와 코르스가 거의 동시에 숨을 삼켰다.

 

“그래서… 아빠한테 부탁했어. 코르스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라크스가 낮게 내뱉었다.

“이봐…”

 

“하지만 거절당했어.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이 너무… 멀게 느껴졌어.”

 

“그래서,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하고… 모든 걸 끝내버리자고… 생각하게 된거야.”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이 귀를 간질였다.

 

라크스가 중얼거렸다.

“세레니아에서 우리가 습격당한 것도…”

 

코르스가 말을 이었다.
“그 절벽에서 내가 떨어질 뻔한 것도…”

 

“모두 내가 꾸민 거야.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어. 당신들은 오히려 시련을 이겨낼 때마다 더 깊은 유대를 쌓아갔지.”

 

이리스가 살며시 웃었다.

 

“그래서… 이젠, 부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거야.”

 

“우리 관계를 없던 일로 한다니… 그런건, 절대 못해.”

코르스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는 이리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리스,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네가 지금 여기서 도움을 청한다면, 우린… 네 그 손을 놓을 순 없어.

네 자신을 지우는 게 아니라, 네 자신을 살리는 길을 찾자.”

 

이리스는 흔들리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여전히 체념의 빛이 남아 있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멀리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짧게 울렸다.

 

줄곧 침묵하던 라크스가 문득 고개를 들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리스. 네가 원했던 건, ‘여자’로서 누군가에게 원해지는 거지?
가족이 아니라, 단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선택받는’ 거.”

 

이리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라크스는 코르스를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럼, 이리스랑 코르스, 둘이서 아기를 만들면 되잖아?”

 

…침묵.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나뭇잎의 속삭임마저 멈춘 듯한 고요 속에서,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코르스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뭐!?”

이리스는 얼굴이 새빨개져 말을 잃었다.
“무, 무슨 말이야!?”

 

라크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농담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진심이야. 네 소원이 그런 거잖아?
‘여자로서 누군가에게 원해지고 싶다’는 거. 그럼, 지금 여기서 이뤄버리면 되잖아.”

 

이리스의 시선이 흔들렸다.

거부와 당혹, 그리고 희미한 희망이 그 눈동자 깊숙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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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us

 

■ 부모의 사랑과 고독

 

이리스는 라크스와 코르스 사이에서 태어나 사랑받으며 자랐다.
부모는 언제나 다정했고, 어떤 순간에도 그녀를 긍정해 주었다.
그 사랑을, 이리스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 밖의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뿔, 눈동자, 꼬리, 그 모든 것이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감으로 그녀의 가슴을 갉아먹었다.
누구와도 같아질 수 없었다. 어디에도 내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가족의 사랑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고독에 사로잡혔다.

■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다

 

성장하면서 이리스의 마음속에 싹튼 감정.
그것은 '누군가에게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이었다.
안기고 싶었다. 원해지고 싶었다.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가족의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별개로, 이성으로서 사랑받고 싶다는 갈망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그렇게 바라봐 주지 않았다.
그 소망은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허공에 흩어졌다.

■ 소망의 행동, 그리고 거절

 

지쳐버린 마음이 한 가지 생각을 이끌어냈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아.
단 한 순간의 위로라도, 쾌락에 빠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원해져, 몸을 나누고, 그 끝에 아기가 생긴다면.
나만의, 작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생긴다면.
그 아이를 사랑함으로써 내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이리스는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그 소망은 부모에 의해 저지당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선택은 단호히, 부정당했다.

■ 코르스에 대한 마음과 결정적인 거절

 

실의에 빠진 이리스가 떠올린 것은 아버지 코르스의 모습이었다.
누구보다 다정하고, 무조건적으로 그녀를 안아준 유일한 존재.
“그렇다면, 아빠가 마지막 희망일지도 몰라.”
그에게만은 모든 것을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리스는 마음을 고백했다.
“코르스의 아이를 갖고 싶어.”
그것은 절망의 끝에서 내민, 가장 절실한 소망이었다.

 

하지만 코르스는 그 소망을 거절했다.
다정함 속에 담긴, 확고한 거부.
그것은 이리스에게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 존재의 부정과 여정

 

"내가 잘못된 거야."
내 존재 때문에 부모를 곤란하게 하고, 상처 주고, 심지어 사랑해준 사람마저 당혹스럽게 만든다.
"차라리 사라지고 싶어." 그렇게 강렬히 생각했다.

 

이리스는 감정을 닫고, 담담하게 자신을 지우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자료를 뒤지고, 금지된 마법과 유적을 찾아 헤매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마침내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나지 않도록 하면 돼."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에, 그 싹을 잘라내면 된다.

 

그렇게 이리스는 떠났다.
한때 사랑받았던 미래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과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