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불빛 : 거절과 수용

 

깊은 숲의 어둠 속으로, 밤이슬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바람 소리조차 멀어지고, 주위는 고요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그 속에서 오직 세 사람의 숨소리만이 희미하게 밤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그럼, 이리스랑 코르스, 둘이서 아기를 만들면 되잖아?”

 

라크스의 말이 고요함 속에 돌멩이가 떨어지듯 울려 퍼졌다.

이리스의 시선이 흔들리며 뺨이 붉게 물들었다. 코르스는 헛기침을 하며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무, 무슨 말이야!?”

 

이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라크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진지하게, 똑바로 이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과 그 속에 깃든 희미한 희망이 이리스의 가슴속에서 치열하게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코르스는 조용히 일어나 팔짱을 끼고,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야. 몸도, 마음도, 제대로 준비가 필요해.”

 

그 눈빛에는 단순한 부정이 아닌, 이리스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진지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라크스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나야 잘 모르지만, 중요한 일이란 건 알겠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리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래에서, 난... 아빠에게 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어.
하지만 지금은…… 정말 괜찮은 건지, 불안해서……"

 

그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결코 모호하지 않았다.

 

라크스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미래에서 네가 거절당한 이유가 딸이라서 라는 건…… 난 납득할 수 없어.
나와 코르스가 아이를 가졌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보통’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거야.
우리는 상식이나 틀에 갇힌 삶을 살지 않아.
이리스, 네 사랑은 절대 잘못된 게 아니야."

 

그 말은, 모닥불조차 없는 어두운 밤속에 한 줄기 불빛처럼 따뜻하게 닿았다.

 

이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때, 코르스가 고개를 들어 조용히 라크스를 바라보았다.

 

"……라크스, 네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어.
확실히 난, 미래에서도 지금도 가족이라는 핑계로 선을 그어왔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누군가가 만들어낸 ‘보통’을 그냥 받아들인 것뿐이었어.”

 

잠시 말을 멈췄다가, 그는 이어갔다.

 

“우린 수인과 용인, 애초에 보통과는 거리가 멀어.
게다가 이리스는 미래에서 온 존재잖아?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쓸 필요 없어.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믿으며 살아가느냐는거야.”

 

라크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거지.”

 

이리스는 눈물이 맺힌 미소를 지었다.

미래에서 가족으로 보냈던 날들과는 별개로, 지금 이 순간, ‘지금의 그들’과 가족이 되어가고 있다는 실감이 가슴 속에 싹트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고, 시선을 내린 채 말했다.

“…그래도, 나에겐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해."

 

코르스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서두를 필요 없어. 우리 셋이서, 지금부터 함꼐 고민해 나가자."

 

라크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우선 서로를 더 알고, 제대로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아직 말로 다 담아낼 수 없는 미래가 조용히 싹을 틔우려 하고 있었다.

 

◆

 

밤이 지나고, 희미한 빛이 숲을 물들이기 시작할 무렵, 세 사람은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오두막은 소박했고, 세 사람이 지내기엔 다소 비좁았지만, 묘하게 아늑한 느낌이 있었다.

 

코르스가 장작을 재빠르게 쌓으며 물었다.

“배는 안고파?”

 

라크스가 이리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코르스 밥이라도 먹어둬. …아마 독은 안 들었을 거야.”

 

“…그런 농담, 제발 그만둬.”

코르스는 한숨 섞인 투덜거림과 함께 조용히 불을 붙였다.

 

이리스는 살짝 웃으며 내밀어진 음식을 두 손으로 받았다.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날 밤, 오두막 안에는 벽난로의 불빛과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이렇게 셋이서 지내는 것도, 의외로… 나쁘지 않네.”

 

코르스의 말에 라크스가 일부러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있으니까.”

 

이리스는 그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웃곤 눈을 감았다.

안심이라는 이름의 잠이 마침내 그녀 안에 찾아오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어스름한 숲 속에서 이리스가 조용히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얗게 피어오르고, 아침 이슬에 젖은 풀이 발소리를 부드럽게 삼켰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깼어?”

 

뒤를 돌아보니 코르스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미, 미안해요… 물을 길으러 가려고…”

 

“화낸 거 아니야. 그냥, 무리하지 말라는 거지.”

 

코르스는 물통을 받아 들며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아침 숲은 변덕스러우니까. 둘이 가면 좀 더 안심이 되겠지?”

 

이리스는 살짝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더니, 곧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숲 속엔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차가운 공기, 젖은 흙과 잎사귀 냄새가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다.

새들의 소리도 어딘가 멀리, 조심스럽게 들려왔다.

 

이리스는 고개를 숙인 채 걷다가, 옆에서 코르스가 나지막이 흘리듯 말했다.

 

“예전엔 나도… 이렇게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게 어색했었어.”

 

바람에 녹아들 듯, 코르스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이리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미래의 코르스는 다정하고 듬직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그는 어딘가 서툴고, 어색하게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렇구나.”

 

작게 답한 뒤, 그녀는 발밑을 바라보며 말을 골랐다.

 

“미래의 아빠는 항상 차분하고, 어딘가 먼 곳을 보는 것 같았어. 그래서 안심할 수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지금의 코르스는… 감정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아서, 그 가까움에 당황했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어.”

 

코르스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이리스의 얼굴을 살폈다.
이리스는 그 시선을 느끼고 작게 웃었다.

 

“그래도, 이젠 괜찮아. ‘지금의 코르스’도 조금씩 이해하게 됐으니까. 조금 서툴지만, 정말로 다정하다는 거."

 

그 말은 조용히 공기 속에 스며들며, 이리스의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이 옅게 번지고 있었다.

 

 

오두막으로 돌아오자, 라크스가 졸린 눈으로 모닥불을 건드리고 있었다.

 

“응? 둘이서 산책… 뭐 좀 진전된 건 있었어?”

 

“…아, 아무것도 없어!”

 

"조용히 좀 해, 라크스!"

 

코르스와 이리스의 목소리가 겹치자, 라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일상. 그런 웃음.

드문드문 나누는 말들과 시선 속에서 세 사람은 조금씩 ‘가족’이라는 형태를 그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