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의 빛 : 기억과 결의
봄의 기척이 숲 속에 은은히 퍼지기 시작할 무렵, 세 사람은 조용히 라크스의 유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눈은 아직 나무 그늘 아래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축축한 흙이 발밑을 붙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바람 사이사이로 부드러운 빛과 풀내음이 숨 쉬고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이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작별을 속삭이는 듯했다.
계기는, 정말 사소한 한마디였다.
전날 밤, 오두막 안에서 모닥불을 둘러싸고 있던 순간.
이리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가보고 싶어.”
그 한마디가 공기 중에 흘러나오자, 불빛이 살짝 흔들리고 누구도 말을 잇지 않았다.
무거운 결심도, 말로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조용한 공기 속에서 세 사람 사이에 자연스레 어떤 암묵적 동의가 피어났을 뿐이었다.
어쩌면, 라크스의 마음 속 어딘가에는 오래전부터 이리스에게도 이곳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흐름 속에서 라크스의 발걸음은 마치 과거의 기억을 따라가는 듯 고요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아련한 그리움과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기대로 뒤섞인 감정이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앞서 걷는 그녀의 약간 뒤에서 이리스와 코르스가 따라간다.
이따금 라크스는 뒤를 돌아본다. 코르스와 이리스가 자연스레 보폭을 맞추며 부드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에 라크스의 가슴 속에 작은 파문이 번졌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부러움도 외로움도 아니었다.
조용히 변화해가는 풍경처럼, 두 사람의 관계도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녀의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아릿해졌다.
라크스는 그 파문을 삼키며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바라보았지만, 입을 열지는 않고 시선을 돌렸다.
“……뇌명초, 아직 남아 있으면 좋겠네.”
이리스의 혼잣말은 바람에 스며들 듯 사라져갔다.
라크스는 어깨 너머로 그 말을 듣고, 입가를 살짝 풀었다.
어딘가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도 나지막이 말했다.
“…샘 주변이라면 피어 있을 거야. 예전엔 그냥 빛나는 풀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코르스가 이름을 붙이기 전까진말야.”
조용히 대답한 뒤, 라크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럼, 전에 발견한 거야?”
이리스의 물음에 코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작년에 처음 와봤을 때는 기록보다 훨씬 많이 자라고 있었어.”
“나한텐 그저 눈부신 잡초였을 뿐이지만 말야. 먹을 수도 없고.”
라크스의 투정 섞인 농담에 이리스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미소에 옅은 기억의 잔향이 겹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들 사이로 바위 언덕이 드러났고 그 아래로 유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끼로 뒤덮인 돌벽, 무너져가는 천장.
바람에 시달리면서도 묵묵히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듯한 그 모습.
푸른 안개가 땅을 기어가고, 희미한 전기가 피부를 찔렀다.
이리스는 걸음을 멈추고,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라크스가 자란 곳…?”
“…응.”
라크스는 짧게 대답하고, 꼬리를 살랑이며 돌로 된 공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가슴엔 그리움보다는 이곳을 동료들과 나눌 수 있다는 자부심이 번지고 있었다.
유적 내부에는 번개의 기운이 가득했다.
높은 천장에서 새어 나온 빛이 이끼에 반사되어, 번개의 샘이 잔잔히 물결치며 수면을 떨리게 하고 있었다.
그 주위를 뇌명초들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은은히 뿜으며 꽃잎이 조용히 흔들렸다.
이리스는 조심스럽게 뇌명초가 피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처음인데도……이 느낌은 뭘까? 분명 처음인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그 목소리는 공간에 녹아드는 듯 부드럽게 울렸다.
“그래?”
라크스의 대답도 속삭이듯 나지막했다.
“응. 바람의 냄새도, 빛의 떨림도…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늘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이어져 있었던 것처럼.”
이리스는 몸을 낮추어 뇌명초 끝을 살짝 만진다. 빛의 입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엄마 방에도 이 꽃이 장식되어 있었어. 어디서 꺾었는지 같은건 생각도 안 했었는데……
하지만 이젠 알 것 같아. 이 꽃, 분명 특별했던 거구나하고.”
그 말에, 라크스는 무심결에 시선을 돌렸다.
‘특별하다’는 말. 익숙한 풀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싫은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뻐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공백이 퍼졌다.
……그렇게까지 소중한 것이었나?
자문해보아도, 바람이 그저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지금은... 아직 모르겠어.
하지만, 이 풀을 바라보는 누군가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싹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코르스가 이리스 옆에 서서 샘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정말 신기해. 전에 왔을 때와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아.”
“…난 처음인데, 왠지 몇 번이고 와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라크스는 그 말에 살짝 시선을 떨어뜨리며, 미약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럴수도 있지.”
“그러고 보니, 작년에 여기서 라크스가 이 돌을 줬어.
별 생각 없이 건네받은 건데, 이상하게 따스해서… 어느샌가 ‘뇌석’이라 부르면서,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
이리스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난 미래에서 아빠한테 받은 거야.
늘 소중히 지니고 다니고 있어.”
이리스는 신기하다는 듯 그 돌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원래는 엄마 거였던 거구나.”
라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짝 시선을 헤매며 말했다.
“나한텐 그냥 돌멩이일 뿐이야… 그래도, 너희가 소중히 여긴다면, 뭐, 그것도 나쁘진 않네.”
그렇게 툭 내뱉고 말을 끊었다.
짧은 순간, 가슴 깊은 곳에 파문이 일었다.
그건 분명히 주운 돌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때 자신의 마음속에는 믿고 맡기려는 각오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누군가 그 돌을 ‘특별하다’고 말해주는 것이 어쩐지 간지럽고 조금 기뻤다.
그러나, 그 말이 닿을 때마다 마음 깊은 어딘가가 조용히 쓰라렸다.
◆
돌아가는 길, 세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기운을 느끼며 산길을 내려갔다.
진흙길을 조심스럽게 밟는 이리스와 코르스는 자연스레 보폭을 맞추고 있었다.
라크스는 조금 떨어져 두 사람의 등을 바라보았다.
예전엔 자신과 코르스, 둘뿐이었던 길에, 이제는 이리스가 합류해, 관계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그 변화를 단순한 외로움이 아닌 사랑스러움으로 받아들이며, 그녀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있잖아, 코르스.”
이리스가 온화하게 말을 걸었다.
“여기에 올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찾아 헤매던 무언가에 조용히 닿은 기분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코르스가 대답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라크스는 말없이 그 자리에 멈춰섰다.
번개의 힘, 기억, 그리고 꽃. 이리스 안에서 이어지는 것들. 그리고, 그 곁을 함께하는 코르스.
그때와는 조금 달라진 풍경 속에서, 라크스는 문득 봄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진흙 위로 뇌명초의 꽃잎 하나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가슴 깊이 이름 없는 파문이 번져간다.
이전엔 느껴본 적 없는 감정에 라크스는 아직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기운은 낯설었지만,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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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스♡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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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또 가까워지는거에요